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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山歴史のまちしるべ多言語版(C57江見鋭馬・江見水蔭屋敷跡)

[2019年9月2日]

ID:18338

Former site of Eima EMI and Suiin EMI’s residence

江见锐马与江见水荫宅院旧址

江見銳馬與江見水蔭宅邸遺址

에미 에이마·에미 스이인 저택 터

江見鋭馬・江見水蔭屋敷跡

Former site of Eima EMI and Suiin EMI’s residence

Eima EMI (1834 - 1871) was a retainer of the lord of the feudal domain Bizen. Loyal to the Emperor, he worked very hard to mediate between the feudal lord and court nobles. After the Meiji Restoration, he was appointed to the high-ranking position Gonnodaisanji of Okayama Prefecture, despite his former low-ranking position.
Suiin EMI (1869 - 1934) was born as the first son of Eima in 1869. He demonstrated his talent in a wide variety of fields, such as novels, general news, dramas, and even sumo. In 1881, he headed to Tokyo in the hope that he would become a serviceman. However, he began contributing to the magazine Garakutabunko through introduction of Sazanami IWAYA. He also established Emizusha and issued the private literature magazine Kozakuraodoshi, before working as a journalist. Afterwards, he joined the publisher Hakubunkan and wrote adventure novels, such as Shonen Sekai (Boys' World). He was such an enthusiastic sumo fan that he built a dohyo ring in his garden and called the dohyo Emi-beya. In 1909, a sumo stadium was constructed in Tokyo and named Kokugikan. The name came from Suiin's writing that "sumo is the Japanese kokugi (national sport)."

江见锐马与江见水荫宅院旧址

江见锐马(1834-1871)为备前藩士(藩主家臣),他在藩内作为拥皇派,奔波忙碌于藩主与公卿诸侯之间的周旋。明治维新后,他身为下级武士,被任命为冈山县的“权大参事(辅佐地方长官的次级官员)”。
江见水荫(1869-1934)出生于明治2年(1869),是江见锐马的长子,在小说、杂志、戏剧、相扑等各个领域发挥了杰出的才干。明治14年(1881),江见水荫立志从军,来到东京,此后通过严谷小波的介绍,开始在“我乐多文库”进行执笔创作。以后他又投身于江水社的设立及同好杂志《小樱縅》的发行活动,并成为了一名报刊记者。此后江见水荫进入博文馆,执笔创作了《少年世界》等冒险小说。此外他还热爱相扑运动,甚至在自家院内修筑了名为“江见部屋”的相扑场地。在明治42年(1909),东京建成相扑场之时,根据江见水荫所著《角力为日本的国技》,将相扑场命名为“国技馆”。

江見銳馬與江見水蔭宅邸遺址

江見銳馬(1834~1871年)是備前藩士(武士),在藩內作為尊王家周旋於藩主和公卿諸侯之間,東奔西走。明治維新後,下級雖是一位武士但被任命為岡山縣的大參事(一種官職,職位僅次於地方長官)。
江見水蔭(1869~1934年)於明治2年(1869年)出生,是銳馬的長子,活躍於小說、雜訊、戲劇、相撲等許多領域。明治14年(1881年),他立志成為軍人前往東京,但其後,因嚴谷小波的介紹在「我樂多文庫」開始了。之後,經歷了設立江水社、發行同人雜誌「小櫻縅」成為報紙記者後,進入博文館公司並撰寫了「少年世界」等冒險小說。此外,江見水蔭非常喜愛相撲,甚至在自己的庭院建造了稱為「江見部屋」的相撲台。明治42年(1909年),在東京建設相撲場地之際,他所寫的文句「角力是日本的國技」成為根源,取名「國技館」。

에미 에이마·에미 스이인 저택 터

에미 에이마(1834-1871)는 비젠 번의 무사로 번 안에서는 근황가로서 번주와 구게 제후들 사이를 알선하는 등 동분서주했습니다. 메이지이신 후 하급 무사였으나 오카야마현의 권대참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에미 스이인(1869-1934)은 1869년에 에이마 장남으로 태어나 소설, 잡보, 연극, 스모(일본 씨름)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습니다. 1881년 군인을 지향해 상경했으나 그 후 이와야 사자나미의 소개로 ‘가라쿠타문고’에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에미즈사 설립과 동인잡지 ‘고자쿠라오도시’ 발행을 거쳐 신문기자가 된 후 하쿠분칸에 입사하여 ‘소년 세계’ 등 모험소설을 집필했습니다. 또, 자택 정원에 ‘에미 베야’라 이름 붙인 도효(일본 씨름판)를 만들 정도로 스모광이었고 1909년 도쿄에 스모바(씨름장)이 세워졌을 때는 스이인이 쓴 문서 ‘스모는 일본의 국기(國技)’가 기초가 되어 “고쿠기칸(國技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江見鋭馬・江見水蔭屋敷跡

江見鋭馬(1834~1871)は備前藩士で、藩内では勤皇家として藩主と公卿諸侯の間を周旋し、東奔西走しました。維新後、下級武士ながら岡山県の権大参事に任ぜられました。
江見水蔭(1869~1934)は、明治2年(1869)に鋭馬の長男として生まれ、小説、雑報、演劇、相撲など多方面で活躍しました。明治14年(1881)、軍人を志して上京しますが、その後、厳谷小波の紹介で「我楽多文庫」にて文筆活動を始めました。以降、江水社の設立や同人雑誌「小桜縅」の発行を経て新聞記者となった後、博文館に入社し、「少年世界」などの冒険小説を執筆しました。また、自らの庭に「江見部屋」と称した土俵を作るほどの相撲好きであり、明治42(1909)、東京に相撲場が建てられた際には、水蔭が書いた文書「角力は日本の国技」が元になり、「国技館」の名が付けら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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